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스티니아누스 1세 (문단 편집)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고토 수복 사업]]에 대한 이모저모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파일:external/www.lessonsite.com/byzanmap.gif]] 한때 그를 비판하는 의견이 학계의 조류가 되었지만, W. 트레드골드, J. 할던, 조지프 테인터 등의 학자들이 조명 받지 못했던 연구를 재평가함에 따라 1980년대 이후로는 재평가를 받는 게 현재의 추세가 되었다. 조지프 테인터에 따르면 [[반달족]] 치하의 카르타고 경제 지표가 오히려 [[로마 제국]] 시대를 상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훗날의 [[이라클리오스]] 로마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밀고 들어오자 카르타고로의 천도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기 본거지였다곤 해도[* 이라클리오스는 즉위하기 직전 카르타고 [[총독]]이었고 그곳 병력을 토대로 [[포카스]]를 타도했었다.] 그렇게 [[사막화]]가 진행되어 피폐해진 지역으로 천도하려고 했을까? [[이탈리아 반도|이탈리아]]도 [[동고트 왕국]]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 일단 무조건 [[약탈]]만 한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통치 체제에 따라 통치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경제 지표도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수복]]한 동로마 제국이 갑자기 증세를 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의 경제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계획을 망쳐놓은 건, 541 ~ 542년 2년간 걸쳐서 동로마 제국을 파괴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고 한다. 이 [[중세]] 극초기판 [[흑사병]]은 카르타고와 [[이탈리아]]의 경제력을 회복시켜 수익을 뽑아내기 전에 국고가 격감시키고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사경을 헤매는 등 전체적인 사업 추진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5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로원]] 계층, 즉 [[귀족]]층의 전횡을 최대한 차단하는데 초점을 둔 행정 개혁을 시도했다. [[매관매직]]과 [[수탈]]이 성행하던 행정체계를 바로잡은 덕분에 당대의 귀족층에게 질시를 당했지만, 이런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바로 착수한 것이 [[동로마 제국|제국]] [[오리엔트|동방]]에서 이루어진 식의 [[행정]] [[개혁]]이었다. 게다가 [[서양]]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동로마 제국]]이다 보니 [[사산 왕조]]에 비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전염병]]에 의한 피해도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또한 [[반달족]]을 정복할 때도 [[아리우스파]]인 [[겔리메르(반달)|겔리메르]]가 왕위를 찬탈하자 뒤에서 돈을 뿌리고 종교갈등을 일으켜 반달족 내의 반란을 조작한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였고, 그 시점에서 적당히 [[조공]]만 받고 끝내려는 수준의 원정 계획을 끌어올려 반달족 완전 정복을 계획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였다. [[벨리사리우스]]를 심하게 견제하긴 했지만 나중에 이탈리아를 수복한 사람은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의 확실한 지원을 받은 [[나르세스]]였다. 실제로 나르세스도 [[타기나에 전투]]에서 [[동고트 왕국|고트족]]을 격파하고 [[카실리눔 전투]]에서 [[프랑크족]]을 격파한 [[명장]]이다. 두 명장들이 다툴 때는 나르세스를 후방으로 빼버리기도 할 만큼, 기본적으로 사람을 쓰는 법은 알고 있었다. 비록 일관성 있게 장기간 중용하지는 못했지만 이건 [[왕]]권 수호에 얽힌 보편적이고도 복잡한 문제인 군권과 실력과 인기를 가진 강력한 신하는 [[로마 황제|황제]]에게 그 자체로 위협이 된다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만의 특징이라고 보긴 어렵다. 결국 [[벨리사리우스]] 개인 능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업적을 전부 벨리사리우스의 역할로 보려고 하는 건 힘들다. 이걸 [[시오노 나나미]]의 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게 한동안 대세 학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모든 걸 다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무리다. 적어도 군사 이외의 수많은 문화적, 통치체계 정비 등의 업적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역할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실제 자신도 [[기독교 신학|신학]], [[음악]], [[역사]], [[법학]]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판을 지나치게 키웠다는 비난도 있지만, 적어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대역병]]이 창궐하기 전까지 [[서양]]에선 [[동로마]]의 약진이 두드려졌고, 동부 전선도 앞서 말한 통치체계 개선을 통한 세제 개혁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조세를 이용해 [[사산 왕조]]를 비롯한 기타 세력들과 화평을 맺었으며, 그로인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즉 철저히 계산된 확장이었다는 소리. 또한 [[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황제]]들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이 등장하기 전까지 500년 동안 [[교황]]에게 압박을 가하고 서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익했다고 평가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남이탈리아는 서방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 지역이었고, 이 지역이 [[로마-노르만 전쟁|노르만족에게 넘어가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지워지자 발칸반도가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전장이 되었던 것]]을 보면 [[동로마 제국|제국]] 수호에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제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그가 차지한 점령지 상당수를 잃고 만다. 허나 [[카르타고]], 남이탈리아, 남부 [[이베리아]] 등 중요 지역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임인 [[유스티누스 2세]] 때의 정치 혼란에 [[암군]] [[포카스]]의 실정까지 겹치자 제국은 허약해진 국력으로 사방에서 압력을 받으며 [[로마-페르시아 전쟁|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을 치러야만했다. 비록 최후의 승자는 [[로마 제국]]이었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결과 [[이슬람 제국]]의 확장을 막지 못 하게 된다. ------ 한편 조금 다르게 바라본 관점도 있다. [[서로마]] [[라벤나 함락|멸망]] 후 [[로마]] 시 [[원로원]][* 즉, 구(舊) 서로마 [[원로원]]]도 어느 정도 돌아갔고, 구(舊) [[서로마]] 시절의 [[속주#s-4|지방행정 체제]][* '''Praetorian prefecture'''나 '''Diocese''' 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동로마]] [[로마 황제|황제]]로부터 명예시민, [[집정관]], [[파트리키우스]] 등 명목상의 관작을 받아서 활동하던 [[게르만족|게르만]] 각국의 [[군주]]들의 모습에서 엿보이듯이, 구(舊) 서로마 지역은 느슨하게나마 [[로마 제국|로마]] 세계 안에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게르만]] [[왕국]]들이 [[동로마]]에게 의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솔리두스|주화]] 발행 같은 경제적 권위 였다. [[동고트 왕국]]이 특히 심했는데 동로마에 침략당하는 와중에 주화 발행을 위해서 전전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 명의로 발행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가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아왔던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서는 아예 대놓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직접적인 전쟁]]에 나섬으로써, 그렇게 새로 그어진 국경 밖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로마에서 벗어난, 달리 말하면 (동)로마가 수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인증되어 버려서[* [[반달 왕국]]을 1년도 안 돼서 멸망시킨 [[벨리사리우스]]가 기세를 타고 금방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손익 계산 자체를 어그러지게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흑사병]]이라는 핑계라면 핑계가 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오래 갔고, 그런 와중에도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내륙지역]]이나 [[프랑크 왕국]]의 [[갈리아]]에 대해서는 손도 못 댄 셈이니. [[브리타니아]]는 [[5세기]] 초에 서로마가 포기하고 떠났기 때문에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지역에서의 구(舊) 로마적 정체성은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53p, 원문 "The impact of the Justinianic Wars, and especially of the fact that they did not result in the West's military domination by the eastern Emperor, cannot be overestimated. After twenty years of brutal destructive warfare waged to make the point,no one could be in any doubt that the areas beyond actual imperial authority were not part of the Empire anymore. They remained lost to barbarians; the frontier between imperial Roman inside and outside had formally been redraw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